[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의 ‘정부서울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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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0-28 03:24 조회5,3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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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의 ‘정부서울청사’
동아일보
입력 2014-02-08 03:00:00 수정 2014-02-11 14:13:42
인왕산 등지고 우뚝… 25년간 25명의 총리 모셨던 곳
정부서울청사(왼쪽)는 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에게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꼬박 25년 7개월 동안(1983년 6월∼2009년 1월) 이 청사에서 불도저처럼 온몸을 던져 일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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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서울청사(옛 정부종합청사)는 우뚝하다. 서울 광화문 앞 세종대로 왼쪽으로 한발 비껴 선 수직건물이다. 그로 인해 인왕산의 울퉁불퉁 뼈마디 굵은 선이 종로 쪽 시야에서 대부분 지워졌다. 언뜻 보면 인왕산잔등에 길쭉하고 갸름한 육면체 탑이 서있는 모습이다. 84m 높이(19층). 1970년에 문을 열었으니 사람 나이로 치면 벌써 40대 중반이다.박철곤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62·현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게 정부서울청사는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딱 25년 7개월 동안(1983.6∼2009.1) ‘풋풋한 젊음과 희끗희끗한 장년’을 송두리째 이 청사에서 보냈다. ‘가장 먼저 나왔다가, 가장 늦게 집에 들어가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며칠씩 밤새우는 것은 흔한 일. 그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은 하숙집이었고, 본집이 바로 이 정부서울청사였다.“지금도 가끔 광화문에 차를 몰고 나가면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청사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 아직 내 책상이 있을 것 같고, 누군가가 꼭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방금 떠나온 고향집 같다고나 할까. 1983년 6월부터 청사 9, 10층 오른쪽 귀퉁이(908, 909, 1009호)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수습사무관을 거쳐 청사생활은 1109호에서 시작했지만, 옷을 벗을 땐 1003호실에서 근무했었다. 9층 남동쪽 머리에 총리집무실이 있었고, 보통 내 방은 같은 층 북동쪽 코너(경복궁 방향)에 있었다. 경복궁과 세종대로가 한눈에 보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땐 경찰의 세종로방어선이 내 방과 거의 일직선상에 있었다. 발아래 경찰과 데모대의 일진일퇴가 빤히 내려다보였다. 어느 풍수전문 교수는 ‘청사에서도 그 귀퉁이자리가 엄청 기가 센 자리라서 보통 사람 같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끄떡없었다. 2008년 쇠고기광우병 사태 땐 건물 좌우 중간쯤에 있는 1003호실에서 촛불시위를 밤새도록 지켜봤다. 만약 불상사라도 일어나면 총리주재 대책회의를 준비해야 했다. 총리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고, 나야 당연히 대기했다.”그의 고향은 전북 진안 두메산골. 찢어지게 가난했다. 땅 한 뙈기 없었다. 아버지(1911∼1968)는 일제 강제징용으로 탄광일 하다가 몸을 다쳐 자리보전하고 있었다. 어머니(1921∼1991) 홀로 품팔이와 행상으로 칠남매(4남 3녀· 셋째아들이 박철곤)를 키워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박철곤만은 어떻게 하든 공부를 시키려 했다. 마침 박철곤이 전주의 한 사립중학교에 3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학비는 무료였지만 ‘먹고, 자는’ 생활비가 문제였다. 한 부자친척 어른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머슴이나 보내지, 공부는 무슨…”하며 힐난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깨는 소리였다. 그 말이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어머니는 마루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박철곤 전 국무차장이 최근 내놓은 자전에세이.
박철곤은 전주 외곽 허름한 집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겨울엔 냉골 방에서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동안 등이 펴지지 않아 이렇게 영원히 굳어버리는 것 아닌가 두려움에 떨었다. 버스요금이 없어 학교는 기찻길을 따라 걸어 다녔다. 어머니가 쌀을 가져다주면, 얼른 싸전에 가서 양이 많은 보리쌀로 바꿔왔다. 맹물에 소금을 넣어 끓인 소금국도 먹고, 사흘을 굶어 어찔어찔한 머리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중학1학년 때 키가 131cm(현 13세 평균 155∼160cm)밖에 안 됐다. 그래도 악착같이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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